Honey_licious worlD








#Day123

in Vancouver

Writer : Hani Kim






2016.02.13





오후 12시, 일어나자마자 엄마, 아빠, 그리고 사촌언니의 이어지는 카톡을 확인하면서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하니야, 외할아버지 천국 가셨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대"





의식적으로 나는 늘 버스를 타러 가는 그 길을 막 나설 때부터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동안 뒤에 서계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곤 한다.

사실 할아버지가 그러신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아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봤는데 아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그 어떤 때부터 한참을 그렇게 우리를

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 역시 어느샌가부터 누군가를 배웅하고 돌려보낼 때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하려고 습관을 들이고 있었다.

그래, 그건할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그 자식의 자식을 위해.

"나중에.. 정말 나중에 할아버지가 저렇게 멀리서 우릴 지켜보는 모습도 못 볼 때가 있을텐데.. 빠이빠이 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라고

동생과 이야기하던 때가 떠오른다. 정말 그랬다. 그 모습이 너무 애틋하게 느껴져서 감사했다.

"할아버지, 빠이빠이"라고 엄마는 옆에서 꼭 말해주곤 했다. 그럼 우리는 몇 번이고 더 뒤돌아서 너무 멀어서 들리지도 않을

"할아버지 들어가세요~ 추워요~"를 반복하며 손을 흔들어드리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먼저, 그렇게 먼저 뒤를 돌은 건 우리였다. 우리가 가야 할아버지도 다시 들어가시니까.

그게 최근 몇 년 내가 느낀 할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그동안 티는 많이 내시지 않으셨지만, 은근히 싫은 소리 잘 하시고.. 

오랫동안 어떻게보면 할머니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착한 남편이 아니셨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야 너무나 헌신적인 남편이 되셔야했고.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고, 그걸 간접적으로 옆에서 보고 느낀 손녀였기에.. 그 분의 자존심, 마음, 사랑, 건강 등 그 모든 영역에 변화가 있었을거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내가 봐온 할아버지는 늘 멋지신 분이셨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다. 

할아버지가 가족에게 어떤 이미지인지, 어떤 상처를 주고 사셨는지, 어떤 상처를 받고 사셨는지. 

그 모든 것들을 모르는 어린 나에게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 잘생긴 미남이셨다. 내가 백일 때인가,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에게 사실

'할아버지'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외할머니보다는 엄하신 분이셨고, 늘 고집하는 무언가가 있으신 분이셨다.

늘 아침이 되면 성경책부터 꺼내읽으시는 어찌보면 고상해보이셨고, 자기만의 철학이 확고하신 듯한 분이셨다.

항상 교회에 가실 때면 양복 혹은 격식을 차리시는듯한 모습으로 집을 나서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 이제 막 '인기가요' '뮤직뱅크' 그런 걸 보기 시작했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기억 중 하나는 할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내가 꼭 티비소리를 줄이거나 티비를 끄려고했었다는 거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할아버지는 너무 보수적이시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것. 그러니까 홀딱 벗고나와 섹시한 댄스를 추는 것 자체. 혹은 정신사나운 음악이 그냥 마음에 안드시는. 

복음성가가 아닌 대중음악을 듣는 것은 그냥 옳지 않은. 그런 생각을 가지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할아버지 눈치를 봤었다. 지금은 그게 그냥 단순하게 기억되지만 그 땐 은근히 나에게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 우리가족 다섯명은 좁은 안 방을 꽉꽉 채워 차지하고는 밤 늦게까지 티비를 봤다. 분명 예전같으셨으면 오셔서 뭐라고 한 마디 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우리가 괜히 눈치를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늦은 밤엔 소리를 줄이고, 최대한 빛을 없애려고 티비를 끄려하겠지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티비프로그램을 보는지에 관해 할아버지를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나보다 9살, 11살이 어린 내 친동생들. 그리고 더 어린 우리 외가의 막내인 초등학생 역시. 오히려 티비를 더 크게 틀고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기까지 했다.

대중음악을 대놓고 틀고, 대중음악에 맞춰 너무나 유연하게 걸그룹 댄스를 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역시 웃으셨다.

그리고 가끔은 함께 드라마를 봤던 기억도 있다. 정말 많이 유해지신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고, 알 수 있었으면서도..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런 거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그저 형식에 갇힌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감기 조심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도할게요.'를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다르게 표정이 바뀌시는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인생에 더 귀기울이지 못했다.

내가 학원에 가고, 좋아하는 아이돌을 쫓아다니고, 바쁜 학창시절을 보내고, 내 고민을 붙들고 힘들고, 진로고민을 하고, 어떤 스펙을 채워야하나 하는 동안

외할아버지는 점점 더 변하셨고, 늙어가고 계셨다. 아주 당연한 이치임에도 그 모든 걸 이렇게 끝에 가서야 깨닫고 있는 나도.. 그냥.. 그냥 사람이구나 싶다.







지난 몇 년 동안 외할머니께서 심하게 아프신 후로 일년이 다르게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도 못할만큼 힘드신 상태가 되고

우리집에서 모신 지 몇 개월, 또 다시 요양원, 집, 요양원. 세보니 횟수로 5년은 되가시는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아마 그 때부터 많이 힘드셨을지 않을까. 사촌언니 말대로 모든 포커스가 점점 외할머니께로 쏠리는 그 상황.

어떻게보면 점점 위기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느끼셨을거다. 그랬을거다.

어린 내가 뭘 알았겠는가.. 나는 아직도 어리다. 엄마와 아빠를 다 이해 못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를 다 어떻게 이해할까.

요즘들어 늘 생각해왔던 거지만 세월을 견디며 사는 힘. 어른이 되간다는 것. 그건 정말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 같달까. 물론 아직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감히 뭐라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나는 사실.. 더 할아버지께 좋은 손녀가 될 수 있었다. 





한 번 더 전화하기.

한 번 더 안아드리기.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해드리기.

한 번 더.. 보기.






이 곳에 오기 전, 할아버지께 쥐어드린 용돈이라곤 단돈 5만원, 그리고 삼계탕 한 그릇. 그게 다였다.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삼계탕을 먹어보자며 나를 데려가신 그 곳에서 우린 정말 배부르게, 맛있게 싹싹 비워 먹고 일어났었다. 

그 떄 역시 굉장히 돈 걱정할 때 였는데 그래도 그거 해드리곤 뿌듯하다고 생각했던 나. 부끄럽다. 

생각해보니 커서는 그게 할아버지와 나, 단둘이 보냈던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신 후, 그리고 내가 워홀을 다짐하고 티켓을 끊은 이후, 

얼마남지 않은 시간때문에 더 마음이 죄송스러워 일주일에 1번씩은 꼭 찾아뵈야겠다하고 할아버지를 뵙고, 요양원을 가서 할머니를 뵙고 그랬었다. 

외할머니와의 시간을 보내려 간 거 였는데 외할아버지와의 시간이 더 적게 남았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그게 내가 나이 먹어가면서 해드릴 수 있는 무언가 중 첫 번째라 생각했을거다. 아주 작지만.. 그게 시작이고,

다녀와서 취직을 하고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그런 걸 보여드릴 수 있을거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남은 날을 계수하며 사는 지혜'는 커녕 내가 하나님도 아니고.. 왜 그렇게 모든 게 쉽고 영원할 것만 같은지.

나는 도대체 뭘 믿고 사는지.. 근데 늘 왜 이런 깨달음은 '끝'을 보고서야만 알 수 있는건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냥 한 없이 작고 약한 인간인건지. 그냥 그 모든 것들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부모에게 자식은 늘 사랑의 대상이고 애틋한 대상이듯. 자식은 부모에게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건 나이를 들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래야만 더 깊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친한 언니가 정말 한국에 안 돌아와봐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아차 했다.

사실 전혀 돌아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손녀딸이라니...

왔다갔다하는 왕복 비행기값을 찾아보니 100-130만원. 여유롭게 돈이 많은 애라면 어떤 일이 있을 때 휙 날라갔다오면 되겠지만

방세, 생활비 내는 것까지만 딱 들어맞는 내 생활비.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없고. 이미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슬프고.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아버지를 추억하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그 분의 사랑을 더 기억하려고 어떻게든 발버둥 치면서 더 멋진 손녀로 살아가는 것. 천국에 가셨을 할아버지를 위해.

또 남겨진 우리 엄마, 외할머니, 친척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왜 하필, 제가  여기 있을 때.. 왜 하필.. 잔병 말고 다른 병은 없을거라고.. 

많이 아프신 외할머니는 몰라도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되실 줄 몰랐는데 왜 지금이냐고..

우리 엄만 어떡하냐고.. 원망도 하고 싶고, 그냥 묻고도 싶지만...

이제 여기서 나는 또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를 보내야한다. 그러다가 나도 가야 한다.

짧다, 그리고 길다. 덜 후회할 수 있게 더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야한다.

오늘 하루 비가 와도 밖에 나가 이력서도 내보고.. 카페가서 계속 하던 인터뷰도 작성하려고 했었는데 그냥 솔직히 멍-하게 보냈던 것 같다.

할아버지를 보내드리자-하고 그냥 집에 있었지만 사실 아직 실감도 안나고, 그냥 하루를 보내버린 느낌도 든다.

마음이 아프다. 삼계탕 한 그릇 더 사드리고 싶다.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사셨는지.. 어떤 게 힘드신지.. 어디가 아프셨던건지...

그냥 여기저기 다 아프지 뭐, 늙어가니까.. 라고 하시던 할아버지. 나이가 드실수록 더 찡찡거리시던 할아버지에게 귀기울이지 못한 우리들.

그 후회의 몫도 우리. 그 아픔의 몫도 우리. 그걸 껴안고 살아야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내가 꿈꿔왔던 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정말 잘 사셨다고' '천국에서의 삶'을 축복해드린다고, 좋게 보내드리는 거였는데

막상 내 일이되니 눈물부터 나는걸 보면 그런 상황은 쉽게 벌어지진 않나보다. 이제 그만 울고.. 축복해드릴, 또 더 좋은 손녀가 되겠다고..

남은 가족들을 위해 더 잘 사는 손녀가 되겠다고.. 하늘에서는 좀 더 자유하게.. 행복하고 평안하게.. 아버지 사랑받으며서 사시라고..

그런 말을 해드리고 싶다. 지금 갑자기 생각난건데.. 한 번은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동생들과 내가 번갈아가면서 안아드리며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돌아설 때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셨던 적이 있다. 그 얼굴을 다시 돌아보진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분명 우리에게 고마워하셨을거다.

왜 그렇게 어릴 땐 표현을 못했을까..하는 반면에 커서라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서, 부끄럽지만 조금씩이라도 표현했던 게.. 감사하다.

어떤 포옹이, 어떤 '사랑해'라는 표현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거.... 그렇기에 우린 늘 그걸 해야만 한다.

포옹도, 사랑도, 진한 키스도, 또 그 사람을 위한 진실한 기도도.. 식사 한 번도...더.....더 말이다. 늦기 전에, 늦게 깨닫기 전에..

근데 이거 알면서도 더 상처내고, 아픈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온다는 게 문제지만....

무튼.. 결국 답은 사랑..........한국에 돌아가서 가장 가까운 내 가족들부터....좀 더 이해하고 사랑해야겠다.

부족한 건 당연하지만 결국 이렇게 삼계탕 한 그릇 더 사드리고싶다,는 바람을 이룰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 때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다.





한국에서는 할아버지 기일이 발렌타인데이. 내가 평소에 즐겨쓰는 음악 앱 '원데이원송'을 켰더니 졸업시즌 때문인지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거야'란 메시지가 메인에 뜬다. 밴쿠버도, 한국도 비가 온다. 

할아버지, 그 티격태격 장난치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할멈- #$*#$#$' 잔소리 반, 장난 반.. 그렇게 말씀하셨던 순간들이 다 꿈같고, 아직도 현실같고..

마지막엔 정말 하루하루가 힘드셔보이셨고 웃음기도 많이 사라지셨지만 그냥 그거 하나하나에 반응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너무 죄송할 뿐이에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드리지 못해 많이 죄송하고, 앞으로도 더 죄송하겠지만.. 저는 여기서, 제가 서있는 곳에서 부끄럽지 않은 손녀가 되도록 열심히..

더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하나님 품 안에서, 예수님 사랑안에서 좀 더 평안하게... 거기선 할아버지 몸도, 건강도, 할머니 건강도...

그런 걱정 없이 진짜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셨음 좋겠어요. 충분히 할머니 돌보시면서 많이 쇠하셨을 몸인데..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변하신 모습 보여주신 것도, 또 할아버지로서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우렁차게 늘 찬양을 부르시던 모습들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엄마에게 온갖 사랑 퍼부어주시면서 그 사랑이 저에게까지 흘러올 수 있게 해주신 것도. 다 감사해요.

그리고 할아버지,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하고, 거기서는 더 많이 웃으시고, 더 평안하셨음 좋겠어요. 

갑자기.. 외할머니한테 뿌잉뿌잉,트레이닝 시키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막 해보라고 해보라고 그러던 게 생각나네요.

사실 그렇게 애교부렸어야되는 건 손녀딸인데, 저도 생각해보면 참 어릴 땐 표현을 못했어요. 그쵸?.. 그래도 크면서는 많이 노력했으니가 봐주셔야돼요.

히히... 그럼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그 땐.. 삼계탕은 아니더라도.. 더 맛있는 만나를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